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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찾아서 2008.04.20 07:40

호안 미로 Joan Miro i Ferra

호안 미로 Joan Miro i Ferra

호안 미로 Joan Miro i Ferra / 프랑스 바르셀로나 / 화가
출생 : 1893. 04. 20
사망 : 1993. 12. 25



생애

- 추상과 기호의 장인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적 환상을 대표하는 스페인 미술가 호안 미로는 야수파와 입체파,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콜라주, 시화, 삽화, 조각, 도예 등 미술의 모든 해안에 닻을 내렸다.
1893년4월 20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출생. 이해, 파리의 보라르 화랑이 문을 연다.
1907년 (14세)바로셀로나의 성 누가 미술 학교에 입학했으나, 일시 학업을 중단하고 바로셀로나에 있는 상사에 근무
1911년 (18세)중병을 앓고 몽치리 별장에서 정양
1912년 (19세)바로셀로나에 있는 사립 가리 미술 학교에 입학. 화가 리카르트, 도예가 알티가스와 알게되고, 이해에 최초로 유화를 제작. 또한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의 작품에 접한다.
1915년 (22세)가리 미술 학교를 수료. 리카르트와 공동으로 아틀리에 마련. 그리고 성 누가 서클의 데상 교실에서 공부했는데, 이때 야수파적인 작품을 제작.
1916년 (23세)바로셀로나의 화상, 다르마우에게 인정받아 그림을 팔 수 있는 길을 터놓았고, 이해, 바로셀로나에서 열린 프랑스 미술전을 감상.
1917년 (24세)바로셀로나에서 처음으로 작품 발표회. 당시 다다의 잡지 [301]을 주재한 피카비아와 만난다. 초상화와 몽리치의 풍경화 등 제작.
1918년 (25세)다르마우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 개최. 알티가스가 중심인 [쿠루베 그룹]에 참가
1919년 (26세)이해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 피카소와 친분을 맺는다.
1923년 (30세)살롱 도똔느에 출품. 쟉크 플레베르, 헨리 미라,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과 알게 됨. 여름철 몽리치에서 <경지>등을 제작
1924년 (31세)브르통, 알라공, 엘류아르 등과 알게 되어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여
1925년 (32세)파리에 피에르 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카탈로그 서문을 반쟈망 펠레가 집필. 또한 피에르 화랑에서 열린 초현실주의전에 출품
1926년 (33세)에른스트와 함께 쟈기레프의 발레 [로미오와 쥬리엣] 무대장치와 의상 제작. 몽리치에서 공상적 풍경화 연작에 착수
1927년 (34년)에른스트, 마그리트 등이 사는 몽마르트르로 아틀리에를 이전
1928년 (35세)네덜란드에 첫 여행,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에 크게 감명받고 <네덜란드의 실내>시리즈 제작에 착수
1929년 (36세)공상적 초상화를 제작. 10월 12일, 파라르 쥰코사와 결혼. 파리의 프랑소와 무통에서 신접살림
1930년 (37년)피에르 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931년 (38세)7월 11일, 장녀 출생. 12월, 피에르 화랑에서 오브제 조각 개인전을 개최.
1932년 (39세)발레 [어린이들의 놀이] 무대장치와 의상을 제작. 뉴욕 피에르 마티스 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933년 (40세)르주 유니에의 [어린시절]을 위해 에칭 제작. 10월, 베르네므 화랑에서꼴라쥬 자품을 전시
1934년 (41세)파스텔화를 시도. 샌드페이퍼에 유채로 그림. 타피스리 <사랑의 제비> 밑그림을 제작
1935년 (42세)카날린 제도의 테네피프 섬에서 열린 초현실주의전에 참가.
1936년 (43세)파리의 인상파 미술관 주최 [스페인 현대 회화전]에 출품. 동판과 메소나이트를 사용한 그림을 제작
1937년 (44세)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 관 벽화를 제작
1938년 (45세)마르크시스 아틀리에에서 동판화 제작
1939년 (46세)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르망디의 발랑쥬빌로 피난.
1940년 (47세)연작 <성좌>를 제작
1941년 (48세)파르마의 몽리치에서 <성좌>를 완성.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회고전 개최
1942년 (49세)바르셀로나로 귀환
1946년 (53세)<밤의 여인과 새> 연작에 착수
1947년 (54세)최초로 미국을 방문
1948년 (55세)파리로 귀환, 마그 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949년 (56세)바르셀로나, 스위스, 베른 등에서 회고전 개최
1950년 (57세)하바드 대학 벽화를 제작
1952년 (59세)바젤 미술관에서 [미로전] 개최
1953년 (60세)파리, 뉴욕, 베른에서 개인전. 도꾜 국립 근대 미술관 주최 [근대 서양화가 걸어온 길]에 출품
1954년 (61세)독일 여러 도시에서 순회전 개최. 베네치아 비엔날레서 국제 대상을 수상
1956년 (63세)파리, 뉴욕의 화랑에서 [도기전] 개최
1958년 (65세)파리의 유네스코 본부 도판 <낮>, <밤>을 완성. 브류셀 만국 박람회 기념전에 출품
1959년 (66세)도판 <낮>, <밤>이 굳겐하임 국제 상을 수상. 미국을 재차 방문
1960년 (67세)하바드 대학에서 의뢰한 도판을 알티가스와 공동 제작
1961년 (68세)파리, 뉴욕, 제네바에서 개인잔. 이해, 미국을 세 번째 방문
1962년 (69세)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에서 대회고전.
1964년 (71세)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서 회고전
1965년 (72세)파리, 뉴욕에서 회화 작품전
1966년 (73세)런던에 근작전, 일본 교토서 미로전
1968년 (75세)파리 마그 화랑에서 개인전
1970년 (77세)오사까 만국 박람회 가스관 벽화 제작을 위해 일본 방문

작품세계

- 꿈의 셰계를 보인 초현실주의 화가

Jacques Dopagne 작 ----이경식 역
스페인에서 카탈로니아만큼 동적이고, 번성하면서 동시에 외부의 관념을 잘 수용하는 지방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카탈로니아 지방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되어 온 특징들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지세와 그 지세가 낳은 사람들이 바로 그 이유였다. 이러한 특징은 또한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 온 카탈로니아인의 성격, 오늘날에도 고수되는 그들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그것을 통해 우리는 미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적어도 그가 어떻게 해서 왜 화가가 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는 1893년 4월 20일 바르셀로나에 있는 오래된 카탈란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보석상과 시계제조업을 하는 사람이었고 외조부는 가구상이었다. 이 두 가지 기술은 손재주와 지능, 적성을 필요로 했다. 어린 나이에 미로는 이러한 솜씨에 있어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7세부터 13세까지 그는 매일같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초상화와 다수의 정물화 그리고 풍속화를 그렸다. 이 모든 그림들에는 그의 세심한 관찰력과 감수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상력이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14세가 되자 그는 미술학교와 사업학교에 동시에 등록했다. 상업학교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데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는 곧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미술 학교에서는 두 명의 훌륭한 선생, 즉 모데스트 우르겔과 요셉 파스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어린 미로는 학교에서 가르키는 학술적인 교육 프로그램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 없었다. 여기서도 그는 학업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이것을 본 그의 부친은 그를 부기 계원으로 취직시켰다. 그 때의 나이는 17세였다. 이것은 분명히 큰 실수였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좋은 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미로가 곧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신경쇠약에 걸렸고 게다가 성홍열까지 앓게 되었다. 병이 나을 때쯤에 그는 그의 부모가 몬트로감으로 공간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마스터하는데 그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미로의 타고난 재능에다 그들의 영향을 첨가하게 될 때 우리는 젊은 예술가로 하여금 그토록 단호하게 자신의 색채주의자임을 주장하게 했던 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선에 대한 미로의 선호는 어디서 온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얼핏 보면 선에 대한 취향은 심리학자들이 소위 말하는 [제2의 자아아]로부터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림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섬세한 즐거움을 즐기는 그 기법과 정말 동일한 기법일까? 1918년에 그린 그림에서 특히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미로의 뛰어난 제도적인 기술은 중국과 일본의 위대한 화가들의 그래피즘을 바로 생각나게 한다. 후기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들 작품에서 색채보다 우선권을 잡는 것은 선, 혹은 싸인이다. 가볍고 활발하게 이 선들은 공간을 헤엄쳐 다니다가 갑자기 대상을 그려 놓는다. 그러다가, 벌써 그 테두리에 싫증이 난 것처럼 그 선은 탈출하여 다이어그램과 같은 더 높은 수준의 진실의 게임에 자신을 내맡긴다. 원시 화가나 동양 화가처럼 미로는 사실보다 더 실제적인 것처럼 보이는 원근법에 특별한 편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평야를 원근법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다시 그려 마치 겹쳐져 보이는 정도에까지 합쳐 놓는다. 이러한 그림은 항상 극도로 세심하게 그려지고 17세기말의 아라비안 세밀화처럼 사물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관람자의 눈에 보이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미로의 재능과 상상력을 사로잡은 모든 영향력 가운데서 -이것은 또 다른 카탈란 화가 달리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신령한 건축가, 고디의 영향을 빠뜨릴 수 없다. 고디의 작품의 특징은 대담성의 눈부신 폭발, 믿기 어려운 직관력과 엄청난 상상력이다. 선과 면, 양감이 혼합하여 완전히 미친듯한 엄청난 형태의 건축을 창조하는 것이다. 미로에게 잠재의식과 꿈의 세계의 문을 열어준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고디였다. 때는 1919년이었고 몬트로이에 사 놓은 시골집으로 요양차 내려가게 되었다.

몬트로이! 미로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할 일을 찾은 것은 거기에서, 그 집에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그의 진정한 일이란 물론 그림이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종류의 그림이 아니라 자기만의 특징을 가진 그림이었다. 이러한 발견을 확신하고 그것을 추구하기로 결심한 그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와서 프란체스 갈리의 개인 학원에 등록했다. 그런데 갈리는 새로운 발견 속에서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 젊은 예술가를 어떻게 도울지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의 인생의 역사는 미술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 때는 1912년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미로가 [모든것]을 발견했다든가 그 작품이 장래에 발전하게 될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든가 하는 오해를 우리는 범치 말아야 하겠다. 그는 단지 이런 발전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숙명이며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새로운 일련의 [충격]들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 몬트로이에서 경험한 [충격] 이후에 그가 격은 중요한 충격중에 하나가 바로 그의 고향 카탈루니아의 예술적인 고적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다양하지만 동시에 동질의 경험이었고 맨 처음에는 전원의 여기저기에 퍼져있는 작은 로마네스크교회 등이었다. 그 교회들은 원시시대의 수많은 작품들로 풍부했으며 마치 비밀을 감춘듯이 서로 몰려있었다. 바로셀로나와 그 주변에서 발견 될 수있는 프레스코, 조각, 제단들은 젊은 미로에게 모든 박물관 중에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이 되었다. 그들의 형태와 양은 마치 선이 검은 윤곽에 새겨 넣은 것처럼 밀집된 면을 가지고 있었다. 화가나 심지어는 단순한 시공들까지도 고도의 감정적이고 상징적인 힘을 달성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형태와 색상을 변화시키고 확대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작품의 외향적인 딱딱함은 사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답고 유머러스하고 비극적인 장면을 보는 것처럼 작품을 보게하는 강하고 급한 리듬에 의해 활성화되어 있었다. 비극적이란 말은 사실 미로를 이해하는데 키포인트가 되고 있으나 나중에 살펴보기로 한다.

어쨌든 미로의 색채 처리라든가 온화한 처리라든가 색과 색 사이의 공간을 진동하게 한다든가 하는것은 모든 중세의 유명화가들의 영향을 입은 덕분이다. 후기 작품의 스타일상의 파격이 어떠했든간에 미로는 즉각적인 생동에 초현실주의 경험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1919년 3월 처음으로 미로가 파리에 도착했을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것은 초현실주의가 아니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사상계나 사회관습 정치학에 일어나고 있는 혼란은 말할 것도 없고 거대한 예술적 혼돈의 와중에 휩싸인 파리였다. 전쟁이 막 끝나고 프랑스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며 자신의 주체성에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 예술에 있어서 미로가 찿은 것은 무엇인가? 거의 모든 야수파 화가들은 자신의 힘을 다발휘했고 야수파 운동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힘은 없었다. 입체파 화가들이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그들 역시 전쟁 전에 시작된 운동에 속해 있었다. 입체파는 이제 너무 익은 과일처럼 터져나오고 있었다.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것은 더 이상 피카소의 관심을 끌지 않았다. 미래파와 두가지 상반된 미학 체제 사이에서의 그들의 계속적인 동요 (정체된 형태의 근거한 미학체재와 동적인 선에 근거를 둔 체재사이에서이 동요)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이 아직 정식 미술 운동으로 평가 받는 것은 순전히 후손들 덕분이었다.

이러한 혼돈 상태의 미로는 어떻게 반응을 보였는가? 잠시동안 그는 입체 미학에 끌렸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화상의 규율은 그의 기질에는 너무 엄격하고 지성적이었다. 그가 만년에 이야기한 [충격]을 이 운동은 그에게 제공하지 못했는데 이 충격은 그의 창작과정을 촉진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1921년 미로는 [라 리코른]이라는 화랑에서 30점의 그림과 몇개의 스케치의 전시회를 가졌다. 위대한 비평가 모리스 레이날에 의해 서문이 붙여졌다. 전시회는 완전 실패였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전시회를 통해 미로가 동포인 피칵소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피카소는 이미 유명해져 있었으며 미로에게 우정의 지원을 해주었다. 그 외에도 미로는 다른 많은 친구를 사귀었는데 앙드레 마송, 피에르 리베르디, 막스 쟈콥, 트리스탄 짜라 등이었다. 또한 그는 몇몇 다다운동에 참여하였고 게다가 앙토넹 아르토, 폴 앨뤼야르, 쟈크 프뢰베르, 앙드레 브르통, 아라공, 그의 걸작 농장을 구매한 헤밍웨이와 교분을 맺었다. 헤밍웨이는 이 그림을 평생토록 간직했다.

초현실주의의 폭발적인 도래는 바로 이 시기였다. 물론 미로는 이 운동에 참가했다. 자신의 작품이 어떠해야 하며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결정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다른 작품을 본다든가 대가들의 작품을 참조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향력은 오히려 반항심이나 젊은 작가들로부터였다. 나태한 공상이라든가 압박과 규율에 미로는 전혀 체질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지성의 붕계를 성형하고 현실의 멸시와 잠재의식과 직관의 절대적인 주권을 표방하는 운동에 그가 이토록 열렬이 참가했는가를 우리는 그의 인격속에 있는 무정부적인 요소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발전에 중대한 이시기 동안 미로는 시간을 나누어 파리와 바르셀로나에 살면서 계속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렸는데 암시적이면서 고도로 이상화된 작품들이었다. <곡물 이삭(1923년 작품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1924년이 되어서야 그는 처음으로 주관적이고 비현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경작된 땅(클리포드 컬렉션)> 1925년 쟈크비오는 갤러리 피에르에서 두번째 원맨쇼를 했다. 5개월 후 미로는 같은 장소에서 브르통과 데스노의 주관하에 열린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참가했다. 막스 에른스트와 함께 그는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 (1926년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와 의상디자인을 했다. 이 시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미로의 생에중 가장 풍부한 시기였다. 그 때부터 [광대의 카니발]이 시작되었는데 이시기의 크라이막스를 이루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드디어 미로는 세계를 찾았다. 이제부터 그의 작품은 그의 극도로 인내심 있고 열렬한 세계의 탐구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된다.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비평가, 시인, 작가들이 미로가 어느 정도 초현실주의 화가로 평가될 수 있는가에 대해 논란을 벌여 왔다. 1928년에 앙드레 브르통이 [미로는 우리 모두 중에서 가장 초현실주의자이다.]라고 한 말은 흥미있는 말이다. 미로는 방법론에 의존한다든가, 자극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는 타고난 초현실주의자였다. 그의 초현실주의는 그 자신의 성실성으로부터 연유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회화의 요구 조건을 하나도 거부하지 않는 초현실주의자라는 점이다. 모든 초현실주의 화가 준에서 미로는 사실상 미술의 수단이나 그의 기숭에 의해 부고된 규제를 결코 경멸하지 않았던 유일한 화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화가로서 미로는 문학의 유혹에 의해 방황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화가가 될 것인가, 단지 화가만 될 수 있을 것 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 초기 아방가르드 작가와의 접촉

미로의 초기 작품들은 20세기 초반 바르셀로나의 조셉 달마우 화랑 주변에서 계속적으로 전시된 프랑스 현대 회화의 새로운 사조들-후기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청년 시기에는 어떠한 아카데미즘적인 운동도 알지 못하였고 고전 작품도 전혀 알지 못했다. 미로는 화가로서의 길을 고전 미술보다는 초기 아방가르드 사조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요소들을 배우면서 시작하였다.
미로가 프랑스 잡지의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한 <노르드-수드>는 화면의 몇몇 부분에서 들로네의 태양의 표면들을 연상시키는 폭발하는 듯한 색상과 두꺼운 붓질을 통해 야수파적 경향 잘 드러낸 작품이다. 또한 정물들의 표현은 세잔느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림 속의 책 제목이나 글자의 사용은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와 후안 그리스의 입체주의 회화의 영향을 나타낸다.

노르드-수르 (1917)
그림에 잡지의 제목을 사용하는 것은 미로가 입체주의 작가인 피카소와 브라크의 초기 작품에서 차용한 것이다.

E.C.리카르트의 초상 (1917)
모델 E.C.리카르트는 미로가 가리의 교실에서 알게 된 젊은 화가로서 바로셀로나 시대에 아주 가깝게 지낸 친구이다. 이 시기에 미로는 리카르트의 초상화 뿐만아니라 그 외에도 친구들을 모델로한 여러 점의 초상화를 남기고 있다. 얼굴의 처리에서 입체파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배경의 우끼요 에는 실제의 화면을 붙인 것으로서 빠삐에 꼴레(붙이는 것)의 영향을 보이며 콘트라스트가 강한 원색들이어서 야수파의 영향을 받고 있다.

V.누비올라의 초상 (1917)
야수파에 기원을 둔 색채와 공격적인 표정을 엿볼수 있다. 또한 탁자 위에 놓인 정물의 처리 기법은 세잔느와 입체주의 화가와의 연관성을 말해 준다.


프라데스 거리 (1917)
짙은 색채와 고통받는 듯한 어두운 하늘은 반 고흐의 작품을 연상하게 한다.

시우라나 마을 (1917)
어두운 색채로 뒤덮인 단순한 화면 구성은 세잔느의 풍경화나, 또는 피카소가 입체주의의 모험을 시작하기 전인 1900년대에 그린 오르타 데 에브로의 풍경화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순간>(L'instant)잡지를 위한 포스터의 도안 (1919)
<순간>은 파리와 바로셀로나에서 동시에 발간된 아방가르드 잡지 중 하나였다. 이 포스터는 인쇄되지 않았지만 이 시대 미술의 지배적인 경향들 중 하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 농원에 대하여

미로의 작품에서 주도적인 내용은 마치 나무가 뿌리를 통하여 대지에서 에너지를 취하듯이 초자연적 힘과의 연관성에 있다. 비록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고향인 타라고나의 코르누데야에 자주 방문하였고, 그의 가족이 구입한 농장이 있는 몬트로이그와 어머니가 태어난 곳인 마요르카 역시 자주 방문하였다.
화가의 상상력에 영향을 준 이 이상화된 전원의 세계의 섬세한 묘사 때문에 그는 자주 세밀화가로 분류된다. 1918년과 1924년 사이의 연작 그림은 이 시골 농장의 모습이 힘있게 분출되고 있다. 풍경과 다양한 대상들에서 대지의 신비한 에너지가 단조롭고 강한 빛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농원>은 그가 첫 파리 여행에서 돌아와서 그린 그림으로 1924년 그의 초현실주의 시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제작한 작품들 중 절정을 이루는 그림이다.

몬트로이그의 교회와 마을 (1919)
비록 색채와 양감에 있어서는 20세기 초 프랑스 회화의 교훈을 잘 따르고 있지만 이미지들의 세밀한 취급 방법에 있어서는 이미 미로의 초현실주의 회화 세계를 보여준다.

소녀의 초상 (1918)
인간의 형상은 미로의 작품 세계에 있어 자신있는 장르는 아니었다. 이 작품에서는 어렸을 때 많은 인상을 받은 로마네스크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노새가 있는 야채밭 (1918)
나무들, 한 마리의 새. 경작된 토지. 그리고 집들이 마치 그것들을 본 적이 있는 듯 꾸밈없이 순진하게 그려져 있다.


스페인 무희의 초상 (1921)
이 무렵에 그려진 초상화들은 거의 초상화의 원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몬드를 닯은 눈, 중세 카탈루냐 회화의 이미지에서 그대로 차용한 깨끗한 옆모습은 그의 모든 초상화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몬트로이그 농원(바르셀로나와 파리에서 제작) (1921~1922)
미로와 농원과의 신비적 관계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중심축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독특한 회화세계는 이 그림에서 집약되는데, 1910년 그의 가족이 몬트로이그에 구입한 농장을 표현하고 있다. 카탈루냐 로마네스크 회화에서 영향을 받은 띠 모양의 수평 구성과 동물의 소박하고 정확한 묘사는 미로풍의 회화적 서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열쇠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후 몇년 동안 초현실주의자들과의 접촉으로 변모된다.

- 초현실주의의 경험

1924년 파우 가르가요가 미로에게 양도한 파리 블로메 거리의 작업장에 살고 있을 때 미로는 시인 앙드레 브르통 주변에서 초현실주의의 그룹을 형성하게 될 다다적 경험을 한 화가와 시인들의 그룹과 교류를 갖기 시작하였다.
미로는 결코 전형적인 초현실주의자는 아니었다. 예술적 재료로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합법화한 초현실주의가 그에게 제공해준 예술적 가능성의 힘과 세밀화 시기 동안 내재해 있던 민속적이고 마술적인 요소들을 종합하면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적 표현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농원>을 단순하게 번안한 작품인 <경작된 토지>와 <카탈루냐의 풍경>은 <어릿광대의 사육제>에서 이미 나타나는 완전히 발전된 새로운 경향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는 그림의 목적이 아니다. 미로에게 있어서는 그림 안에 자신의 기억과 살아 있는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회화적 중재로서의 도구이다.


어릿광대의 사육제 (1924~1925)
파리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에서 사람들의 흥미를 끈 여러 작품들 중 하나가 이 작품이었으며 미로가 새로운 미학으로 완전하게 제작한 첫번째 작품이었다.

서커스에서 (1925)
1925년 작품으로, 이 시기는 미로의 파리 생활에서 여러가지 변화를 볼 수 있다. 1924년 미로는 브르통 등 시인들과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하고 있으며, 작품 또한 그 특유의 환상성을 바탕으로 한 단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형태와 선은 극도로 단순화되면서 추상적인 표현으로 이행하여 간다.



낮잠 (1925)
파리의 피에르 화랑에서 열린 최초의 초현실주의전에 출품하는 등, 미로가 초현실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시기의 일련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바탕에 엷으면서도 거칠게 칠해진 푸른색은 바로셀로나의 지중해를 상상케 한다.



누드 (1926)
누드라고 말하나 하얀 인어와 같은 입상이다. 종횡의 점선은 조형적인 요소로 있는것과 동시에 누드의 해부를 나타내고 있는듯 하다.인간을 물고기나 야채나 과일 등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여러가지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새에 돌을 던지는 사람 (1926)
거대한 발을 가진 사나이가 단순화되어진 새에 하얀 돌을 던지고 있다. 흑과 같은 육지의 두 개의 돌출부는 빨갛게 칠해져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몽리치의 바위를 나타내고 있는듯 하다. 남자의 손은 하나의 선으로 되어 돌이 날아간 흔적이 하늘을 깁고 있다. 미로는 도시의 밀실적인 환각과 대자연에 묻혀서 보는 꿈과의 두 세계를 왕복하고 있다.


세사람의 인물 (1927)
푸라테리니라고 하는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각지에서 인기가 높았던 도화사 삼 형제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눈, 코, 입으로 환원되어진 세 사람의 인물, 코가 유달리 크며 어딘지 코믹한 느낌이 전체에 풍기는 작품이다.

풍경(산토끼) (1927)
<새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등과 비슷한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화면을 대담하게 양분하여 오랜지색의 하늘과 포도주색을 지면으로 한 독특한 구도이다. 무대는 대부분의 경우 대자연이나 광막한 우주를 나타내고 있다.

네덜란드의 실내2 (1928)
미로는 1928년 봄 2주간에 걸쳐 네덜란드에 여행했다. 여기에서 미술관을 두루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특히 그에게 흥미를 갖게 한 것은 페르메르를 위시한 17세기 화가들로서, 손에 와 닿을 듯하게 친밀하게 그려진 실내화들이었다. 그 그림엽서들을 사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 이 <네덜란드의 실내>이다.

경작된 토지(몬트로이그 타라고나) (1923~1924)
집, 나무 그리고 몇 가지 형상들은 <농원>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였으나 여기에 눈이나 나무 옆의 귀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요소들을 덧붙이고 있다.


카탈루냐의 풍경(사냥꾼)(1923~1924)
두 가지 색채로 나누어진 화면은 하늘과 땅을 암시한다. 오른쪽 하단 모서리의 글자 'sard'는 이 작품 아랫부분의 가는 뼈를 드러낸 정어리를 지칭하고 있다.

흡연자의 머리 (1925)
순수한 하늘색 배경은 이 시기에 자주 사용된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인물의 종합적 묘사 안에 나타난다.

뱀이 있는 풍경 (1927)
수평의 선은 화면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서 구체적 시각 경험이 그림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장소이다.

네덜란드의 실내1 (1928)
1928년과 1929년 사이 미로는 17세기의 네덜란드 실내를 그린 옛 거장들의 그림에서 감명을 받아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이 작품은 H.M. 소르그의 <루트를 타는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 잘 짜여진 구성위에 독창적인 인물과 모티브는 형상적인 상형문자로 변형되었다. 미로는 이런식으로 꿈의 언어를 실제적으로 변형시키고 엄격하게 회화적 세계로 인도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인물

초현실주의적 회화 표현에 동화된 후 미로는 인간의 형상의 독특한 도상을 창조하였다. 1929년부터 1938년까지 계속되는 색깔과 형태의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연작 그림에서는 확실하고 자유로운 선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콜라주작업을 통해 캔버스 위에 옮겨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였다. 아마도 스페인내전(1936)의 조짐이 있었던 몇 년 동안의 주변 분위기가 화가의 정신 상태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였는지 이 시기 그림의 배경은 대부분 어두운 색으로 칠해졌다.
<비밀결사대에 대한 그림>은 기호적 표현으로 내란을 암시하고 있는데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을 도안화한 연작 중의 한 작품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배설물앞의 남자와 여자>, <달과 마주보고 있는 여자와 수캐>, <하나의 별이 흑인 여성의 가슴을 애무한다>와 같은 작품들은 이 시기의 특징인 어두운 배경이 눈에 띄는 작품들이다.


콜라주에 의한 그림 (1933)
제목이 의미하듯이 미로는 구성을 위해 이전의 콜라주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과정에서 회화적 표면 위에 형태의 배치를 생각했다.

프러시아의 루이즈 왕비 (1929)
1929년의 전반에 미로는 <상상 상의 초상화>시리즈를 그렸다. 여기에서 보다 명확하게 미로의 스타일을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발상은 자동차 디젤 엔진의 포스터에 있는 모터 사진으로서, 그것을 바탕으로 많은 데생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최초의 구상은 파리의 지하철 승차표에 그려졌고, 모터가 어느새 여자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1750년 밀즈 부인의 초상 (1929)
이 초상화는 레이놀즈의 제자인 조지 잉글허트의 작품을 근거로 한 같은 제목의 미로작품으로 사치스럽게 옷을 입고 많은 보석으로 치장한 18세기 한 귀부인이 사랑의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인은 미로의 조형세계에 있어 지속적인 조형언어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는 우스꽝스러운 패러디의 어조로 표현되었다.


공간 안의 외침과 나부 (1932)
형상의 왜곡과 강렬하고 고뇌에 찬 색조의 구성은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초기 작품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미로의 조형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많이 보이는데 특히 결정적 시기의 대표적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산더미처럼 쌓인 배설물 앞의 남자와 여자 (1935)
형상의 왜곡과 강렬하고 고뇌에 찬 색조의 구성은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초기 작품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미로의 조형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많이 보이는데 특히 결정적 시기의 대표적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비밀결사대에 대한 그림 (1936)
27개의 과격한 내용을 도안화한 연작 중 하나로 비밀결사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어떠한 설명적 묘사도 없이 기호적 표현으로 스페인 내란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의 별이 흑인 여성의 가슴을 애무하다 회화-시(1938)
시적 분위기의 이미지 연상은 브르통을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 멤버 중 가장 정통파 회원들이 실천한 기법이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에 미로는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남자의 머리 (1932)
머리 윗부분의 그림자는 형상과 배경을 혼란시키면서 애매한 양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이미지는 파우 가르가요의 조각작품을 연상케 하는데 미로는 얼마동안 블로메 거리에 있는 작업실을 그와 같이 사용하였다.

달과 마주보고 있는 여자와 수캐 (1936)
일 년 후에 제작되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보이는 여성 형상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두 작품은 전쟁의 공포 속에 있는 희생자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격정적인 감정의 표현은 <스페인을 돕자>라는 포스터와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게르니카>와 함께 전시되었으며, 이것은 전쟁 중에 분실된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의 형상적 표현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달팽이, 여자, 꽃, 별 (1934)
신체의 팔 다리는 아주 극적인 감정이 수평선에 의해 강조되고 있는 <산더미처럼 쌓인 배설물 앞의 남자와 여자>에 보이는 것과 같이 다시 길어진다. 여자와 별은 미로가 표현하는 본질적인 두 가지 주제인데 이 작품에서는 수평선의 사용없이 그가 화가로서 평생동안 추구한 공간의 해방을 예고하면서 대상들을 떠 있는 것 같이 표현하였다.

자화상1 (1937~1960)
1937년에 납성분의 연필심과 유화의 작은 터치로 그려진 이 복잡하고 세밀한 자화상은 그로부터 23년 뒤에 첨가된 자유롭고 확고한 선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1937년의 그림과 그 위에 중첩되어 그려진 각각의 그림에서 눈의 표현은 주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눈의 표현은 미로의 많은 작품에서 상형문자의 형태로 융합되어 사용된다.

구성 (1936)
기름과 마티에르를 적게 사용함으로써 이 유화 작품은 평면적이고 선적이면서 뾰족해 보이는 그래피즘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초상2 (1938)
<자화상>의 비극적 사실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미로는 이제 이미 모든 세부묘사를 생략한 단순한 색깔의 상징적인 형상을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눈의 특별한 형태를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모더니즘 액자속에 회화 (1943)
미로는 바르셀로나 경매장에서 호안 프라츠가 구입한 이 액자의 현대적인 장식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는 프라츠에게 액자를 빌려달라고 청하여 가지고 있다가 돌려줄 시간에 이르자 자신이 그린 그림과 함께 돌려 주었다. 이 작품은 미로가 액자를 생각하면서 완성한 유일한 작품이다.

스페인을 구하자 (1937)
<스페인을 구하자>는 미로의 컬러 스텐슬에 의한 포스터이다. 의연금 모집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서, 노동자가 주먹을 굳게 쥐고 눈을 부라리면서 무언가 큰 소리로 호소하고 있는 듯한 인물은 치졸한 듯 거칠게 그려져 있다. 정치적인 자세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았던 미로로서는 진귀한 정치적 참가의 작품이다. 포스터의 아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현재의 싸움에 있어서 나는 프랑코측의 시대 착오적인 폭력을, 반대측에는 스페인을 격동속으로 몰아가는 인민을 본다. 그 힘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 성좌

미로는 1939년에 그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 북서 지방 노르망디의 조그마한 해변 마을인 바른느빌에 정착하나 독일 군대의 진군 때문에 그 다음해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적대적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과 지중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분위기와 아주 다른 노르망디의 빛과 풍경과의 만남은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보통 <성좌>라고 부르는 23개의 작은 크기로 그려진 작품에 조형적으로 아주 잘 표현되어 나타난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엉켜져 있는 선들과 새, 우의적 인물, 별, 동물들을 암시하는 작은 색깔의 상형문자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두껍고 긁혀진 종이 위에 완성된 <성좌> 연작의 생동감 있고 질감 있는 화면을 더욱 더 활기 있게 만드는 모티브이다. 우주의 이미지는 화가를 확장되고 상상력이 풍부한 넓은 공간으로 인도한다. 아무리 작품 크기가 작아도 미로는 그것을 큰 캔버스 작품처럼 보이게 했으며 1941년 이후 <성좌>는 여러다른 작품에서 보편적인 그림 구성의 체계로 더욱 발전한다.


별빛 아래서 머리를 빗는 황색겨드랑이 털을 가진 여인 (1940)
바른느빌에서 그때까지 그렸던 <성좌> 연작 중 하나이다. 그림의 모티브들은 아직까지 그림의 양극단을 피해 화면의 중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인물은 작품 구성의 초점을 이루며 이 구성 안에서 하늘은 주위 환경으로 그림의 배경과 연결되고 있다.

한마리 새의 비행에 둘러 싸인 여자 (1940)
별들은 두 개의 마주보는 삼각형으로 표현되었고 연속되는 새의 위치는 여자들을 에워 싸지만 실질적으로 그림의 한계를 넘어 확장되는 구성을 만들어내면서 그림의 가장자리를 침범하고 있다.

- 고유언어의 정복

1942년 미로가 바로셀로나로 돌아왔을 때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격동적인 시기는 막을 내린다. 1941년 뉴욕 전시를 시작으로 그는 화가로서 자신의 양식을 확립해가고 20년대부터 형성되어 지속되어 온 개인적 조형 언어 안에서 회화적 글쓰기도 확고하게 방향을 잡게 된다.
<성좌>는 그림의 모든 공간에 형상과 배경을 융합하면서 통일된 화면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이용된 작품이다. 1945년부터 미로풍의 기호들은 개성적인 어휘로서 작품에 체계적으로 자리잡는다. 이 시기의 회화는 화면의 질감과 색채를 융합하여 아름다운 형상과 배경을 일치시킴으로써 회화적 공간, 즉 자율적인 회화 공간을 정의하고 있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갉아 먹는다 (1948)
첫번째 미국 여행에서 돌아와서 그린 작품으로 배경은 한 가지 색으로 능숙하게 처리하였고 미로에게 있어서 조형언어의 기본 요소인 눈, 별, 여자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종달새를 쫓는 빨간 원판 (1953)
이 작품은 화면은 더욱 대담해지고, 난폭하리만큼 거칠게 다루어진 인물은 그 특유의 세 가닥으로 가늘게 그어진 모발도 여기에서는 커다란 붓으로 색칠되어져 있다. 얼굴의 윤곽선을 엷은 색으로 둥글게 긋고 짙은 점으로 꼭꼭 찍어 나간 것이 장난스럽기까지 하다.

밤중의 인물들 (1950)
캔버스 올이 드문드문 보이도록 남겨둔 배경 속에서 반추상 형태인 그만의 조형언어가 어린아이같이 자유분방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구사되었다.


호아킴 고마스를 위한 벽화 (1948)
미로는 인습적이지 않은 화폭 위에 많은 다양한 실험 작품을 하였다. 이 경우는 파이버시멘트(석면과 시멘트를 섞은 재료)의 화폭 위에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한밤중의 여자와 새들 (1946)
이 작품에서처럼 양성의 성적 특질들이 결합된 여성, 인물, 태양, 새, 별 등 지구를 상징하는 것들은 미로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의 차원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본질적이다.


청색2, 청색3 (1961)
1960년경 미로는 대형 작품의 단색 화면 안에서 행위적 작업과 붓놀림을 통하여 그림에 일관성을 부여하면서 재현적 내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진동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전개한다.

- 언어의 정체

1961년 세번째의 미국 여행과 파리의 '메트화랑'과 뉴욕의 '피에르 마티스 화랑'에서의 전시회를 마치고 난 뒤 미로는 <청색2>와 <청색3>을 제작한다.
이 시기는 앞서 형성된 과거의 조형언어를 심오하게 하고 정제하는 기간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림들을 선으로 그리고 형성하고, 구성하고 색칠할 때 예술가에 의해 도달된 자유로움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추상적 형상은 너무나 개성적이어서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 독특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미로는 사물의 운동과 정지상태를 기호로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진행되는 것은 하나의 선으로써 재현하였다. 이 선은 일반적으로 가는 선으로 표현되며 점 안에서 또는 괄호 안에서 정지된다. 이 최소한의 기호는 마치 에너지의 분출을 막는 하나의 장벽으로 자주 사용된다.

인물과 새 (1963)

호안 미로는 차츰 더 아카데미즘 작가나 다른 어떤 사조의 작가에게서도 보기 힘든 어린아이 같은 즉흥성을 띤 직관적 조형언어에 다가가고 있다.
확고한 형태로 그려진 굵고 검은 선은 마치 그 선들을 가로막고 있는 투명하고 깨끗한 방해물을 부셔버리는 듯한 역할을 한다.
인물의 윤곽이 명확하게 형성되고 있으며 팽팽하게 진동하는 색이 작은 면들을 가득 채운다.
위대한 작가적 숙련으로 화폭의 색깔과 질감이 융합되게 배경을 처리하였고 또한 20년대 그의 그림에서 사라진 수평선이 다시 이 작품안에 사용되어 화폭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한밤중의 여자와 새 (1967)

인물과 새 (1967)


스키의 교훈 (1966)노년기에 이르면서 미로는 그의 천직인 화가로서의 소명 의식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그의 조형언어는 예전 작품에서 보이는 것과 같으나 <여자3>에서 보이는 선의 확고함과 <스키의 교훈>에서 회색의 빛나는 색조는 그만의 표현 양식을 더욱 풍부하게 다져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조형 언어가 가지는 특징적인 기호는 색을 둘러싸고 있는 확고한 선과 더불어 그의 독특한 붓 사용을 통해 기록된다.

여자3 (1965)

여자와 새들 (1967)
미로는 그의 작품에 여러가지 다양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전생애에 걸쳐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미 <성좌>연작에서 사용하였던 물기 있는 종이와 구겨진 종이를 이용한 기법은 매우 촉각적이다. 이는 눈을 가리고 만지기만 하여 대상을 그리게 한 젊은 시절 프란세스 갈리의 수업에서 비롯되었다.


모음의 노래 (1967)스페인 내란 동안 미로가 사용한 검은색은 이 작품에서 또다른 주요한 역할을 가지게 된다. 이전 시기의 작품에서 보이는 격정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선의 유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현학적으로 배색된 우아한 배경을 택하였다.
여인과 새 (1967

-태양 행성 새

미로의 확고한 예술 세계는-그의 지속적인 모색에 의해서 발견된 열려 있는 여러 다른 경로에 대한 확실성-60년대 중반 그의 표현적인 회화기법을 최소한으로 하여 완성한 연작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미로는 그의 신비적 의식(본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 함몰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자연의 절대적인 내면으로 도피하였다. 나는 나의 얼룩들이 허공의 매력적인 부름에 열려 있기를 바랐다... 나는 비어 있음에, 완전한 공허에 관심을 가졌다." 밝고, 진하며 진동하는 색채의 도그마 안에서 분실되어 버린 태양의 표면, 비행하는 새의 유연한 흔적, 별의 섬세한 선들은 즐거운 내적 성찰을 설명하기 위한 충분한 회화적 장치였다.


태양 앞에서의 잠자리의 비행 (1968)
미로에게 있어 잠자리의 비행을 표현하는데는 하나의 선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잠자리의 비행은 거대한 태양 앞에서 거의 느껴지지 않는 회화적 표현 행위로 요약되었으나 화가의 눈에 있어서는 그 자신처럼 중요하다.



달빛속에서 새의 비행 (1967)미로는 두 작품에서 자유로운 공간을 창조하기 위하여 수평선을 사용하지 않고 색채로써 화면에 경계선의 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 공간의 신선함과 에너지는 이미 칠십대인 미로를 힘있게 만든다. 또한 공간의 비어 있음은 예술가를 심연처럼 끌어당기고 있으나 이 비어 있음은 너무나 친밀하고 즐거워서 모든 번뇌를 떨쳐 버리게 하고 있다.

두 개의 행성으로부터 추적당하는 머리카락 (1968)

금빛 후광의 푸른 종달새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초원 위의 잠자는 아마폴라(양귀비꽃)의 심장에 도착했다 (1967)
검은색의 수평선은 예전의 그림에서 보이는 수평선을 연상시키지만 이 작품에서의 수평선은 환상적인 세계를 분할하는 선이며 물리적인 세계를 분할하는 선은 아니다.

붉은 눈밭 위의 물방울 (1968)
간단한 회화적 표현 행위가 궁극적으로 밝음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진동하는 색깔이 공간의 비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런 류의 그림에서는 아카데믹한 회화적틀에서의 해방이 절대적이다.

- 마지막 시기

미로의 후기 작품들은 풍족한 검은색과 계속되는 점적들, 드리핑기법을 통한 회화적 표현들이 마음에 걸릴 것 없이 풍부하게 나타나며 60년대 이후에 전시된 작품들은 상승하는 리듬감이 돋보인다. 미로는 화가로서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유명해졌다.
그의 독창적 예술성과 제작의 즉흥성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항상 암시하는 대지, 하늘, 여자나 새와 같은 주제들은 이미 20세기의 고전이 되었고, 여러 회화적 방법, 즉 구성의 단순성과 안정된 선이 매우 강렬한 원색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러한 미로의 독창성은 광고, 그래픽 디자인과 같은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주며 자신의 후기 작품의 제작에서도 위와 같은 방법이 사용된다.

하루의 시작 (1968)

미로는 <농원>에서부터 형성된 그의 주제를 끝까지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그는 후기에도 몬트로이그의 토지와 농부 등 자연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표현하였다. 시각적으로 힘있게 구체화되는 상징적 형상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작품<매혹적인 인물>은 빠른 회화적 표현 행위와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달빛 아래의 카탈루냐 농민 (1968)


매혹적인 인물 (1968)

한밤중의 여자와 새들 (1968)
미로는 스페인 내란 기간중 그가 실험한 바 있는 회화적 표현행위의 원시적 격렬성을 회복한다. 그의 후기 작품은 그가 축적해 온 회화의 모든 과정을 재검토하는 것 같다. 선에 대한 그의 집착은 대단한데 단색으로 초벌칠이 된 배경이나 그 위에 물감이 튀겨 흩어져 있는 배경의 표면 위에 표현된 굵고 검은 선의 풍부함에서 잘 나타난다.



태양과 여자와 새 (1972)
미로의 독창적인 회화 세계는 과장된 인물 표현과 상징적인 특징으로 가득 채운 화면 구성이다. 비례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여자, 새, 별은 이미 보편적인 상형문자가 되었다. 태동중인 미로의 조형언어는 우리들의 눈 안에서 점차 그 독창적 형태를 취해 가고 있다.

불에 태운 캔버스 (1973)
미로는 40년대부터 모든 종류의 캔버스와 회화적 재료를 실험하기 시작하였다.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길에 접어든 1970년에서 1980년 사이에 미로는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캔버스 뒷면의 틀이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캔버스를 태우는 실험도 한다. 이는 예술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엉뚱한 어떠한 방법도 사용할 수 있다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굳은 걸음으로 앞으로 향해 나가고 있는 미로의 혁신적 발산인 것이다.

한밤중의 여자 (1974)
때때로 이미지는 배경과 형상이라는 용어의 관계를 뒤바꾸면서 사진의 음화와 같이 표현되고 있다.

가면 (1978)
미로는 판화에서도 회화 작품과 같은 조형언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석판화 작품으로 미로의 회화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응용미술

호안 미로는 회화의 영역에서 자신의 조형언어를 형성해 갔지만 조각, 세라믹, 태피스트리와 같은 인접 분야의 작품 제작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이전의 작품에서도 여러 예들을 찾아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여러 장르에 대한 그의 열성적인 헌신은 1940년대부터 그 토대를 굳건히 하고 있다.
그의 특징적인 조형언어가 확고해지고 회화적 작업과 다른 여러 응용 미술 분야를 실험한다. 1915년부터 정기적으로 작은 규모의 작품 뿐만 아니라 큰 규모의 작품까지 활기있게 제작하였다. 도기화에서부터 거대한 장식적 벽화에 이르기까지 공동 제작된 이러한 작품들은 실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세라믹 작품과 비슷한 조각에서도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전통을 따른 그의 예술성을 잘 보여준다. 일상적인 오브제를 융합시키면서 공간과 양감에 아주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로는 젊은 시절의 열정으로 이 모든 응용 미술의 작품제작에 임하였다.
그의 목적은 화가로서 획득된 명성 속에 안주하거나 세속적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언어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작은 부엉이 (1954)
50년대 미로는 로렌스 이 아르티가스와 함께 여러 재료들을 융합한 작은 세라믹 작품의 기술적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이 작품의 이미지와 질감은 미로가 평생동안 그의 작품안에서 지속해 온 스페인 문화의 심오한 영속성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우상의 세계와 선사시대의 지중해 테라코타 작품을 생각나게 한다.


여자와 새 (1967)예술 작품에 있어 일상생활에서 발견된 오브제의 사용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유산이다. 미로는 발견된 오브제의 문맥적 내용을 바꾸고 그의 독특한 상형 문자적 형태의 세계로 그것들을 융화시킨다. 프라이팬, 삼각모자, 수도꼭지를 동으로 주조하고 그 위에 색칠을 가하면 초현실주의자의 오브제 조각은 새로운 차원을 획득하게 된다.
달아나는 소녀 (1968)

거대한 태피스트리 (1974)
이것은 뉴욕의 한 마천루 건물의 로비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미로는 조그마한 스케치만 완성하였고 미로의 이러한 작업에 협조자로 참여한 공예가 조셉 로요에 의해서 섬유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안티플라토스 (1956)
미로 작품에서 보이는 공예적 기술은 미로와 같이 일을 한 장인에게서부터 나온다. 이 작품의 경우 로렌스 이 아르티가스가 그 장인이다. 미로는 한번도 자신의 고유한 공예적 작업 전통을 망각하지 않았다.



여자와 새 (1981-1982)
이 기념비적 조각은 미로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의 그림에 있어 가장 특징적인 두 가지 소재인 '여인과 새'를 통합시키고 있다. 오늘 날까지 이 이름으로 바르셀로나 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타일 조각들로 덧 붙여진 이 시멘트 조각은 호안 가르디 아르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가우디풍의 구엘 공원의 형태를 암시하고 있다. 이 공원은 예술가의 모든 작품을 활기 있게 해주며 주제, 불안감, 주변과의 영향 관계 등을 고려한 종합 예술을 생각하게 한다.

출처:http://myhome.naver.com/joanmiro/

호안 미로 http://myhome.naver.com/joanm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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